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
Ich bin ein Berliner 나는 베를린 사람(시민)입니다.
Berlin ist arm, aber sexy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쎅시합니다.
베를린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말들 중에서 아직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두 문장이다.
첫번째는1963 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였던 John F. Kennedy 죤 에프 케네디가 베를린을 방문하여 연설 중에 한 말이고 , 두번째는 현 베를린 시장 Klaus Wowereit 클라우스 보베라이터가 2003년에 베를린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독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을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즉 과거와 현재의 베를린을 응축한 대표적 표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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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동서독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케네디가 서베를린을 방문을 하였다. 그가 연설의 말미에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고 서툰 독일어 발음으로 말한 그 문장은 당시의 독일인들, 특히 서베를린 사람들의 심금을 크게 울렸다. 케네디의 그 연설은 아직도 전설처럼 생생히 전해지고 있는데 아마도 마지막의 그 한 문장 때문에 역사적인 연설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케네디는 장벽 건너 편에 있는 동독을 향해서 그리고 멀리는 쏘련의 향해서 장벽은 사회주의 체제의 비인간적이고 비겁함 나아가서 공산주의 체제의 실패를 노증하는 것이라 열변을 토하면서 서방세계의 자유를 선창하였다. 서베를린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에 포위된 유일한 서방세계의 해방구, 즉 자유의, 자유에로의 창구였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모두가 다 베를린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베를린 사람입니다 라고 말할 수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라고 한 그 연설은 분단의 아픔을 감수하던 서 베를린 시민들의 심장을 관통하여 베를린 장벽을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문장으로 남게 되었다.
원래 로마 제국의 키케로Cicero 가 <나는 로마의 시민이다. civis romanus sum> 라는 말을 베를린 상황으로 옮긴 케네디의 연설이 당시 서 베를린 시민들에겐 얼마나 큰 위안과 희망을 준 연대사였는지 이곳 독일에서는 그 때를 경험하거나 기억하는 세대들의 감동을 통해 가히 짐작할만하다. 올해가 바로 케네디 베를린 방문 50주년이여서 각종 기념 집회와 행사는 물론 때 마침 올여름 국빈으로 온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방문과 중첩되는 가운데<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는 문장의 신화는 또한번 많은 언론의 화두가 되었다.
분단의 체험장이였던 베를린은 통일이후 다시금 통독의 생생한 실험장이 되어 지금의 베를린이라는 독특한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현직 베를린 시장인 보베라이터Klaus Wowereit 가 2001년에 첫 당선이 되었을 때만 해도 베를린의 통독후유증은 심각한 수준이였을 때다. 그 전까지 보수정당인 기민당이 집권하다가 사민당인 젊고 패기있는 그가 당선되어 2003년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만성적 적자 재정과 실업률 20페센트를 육박하는 상황에 직면한 당시의 베를린을 <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쎅시합니다> 라고 변호하였다. 그 문장은 즉각 언론에 회자되어 단연 베를린 슬로간 제 일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나 그가 동성애자라고 스스로를 커밍아웃 한 것은 부정적인 파문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그의 솔직함과 용기를 쿨cool하다고 하여 그의 인기를 상승시킨 보너스가 되기도 했다. 보베라이트 시장이 시대감각을 여지없이 발휘한 그 재기있는 한마디는 통일 후유증을 단단히 앓고 있던 베를린 시민들에게 위로뿐 아니라 통일된 도시, 베를린의 정체성에 신선한 색갈을 부여하였고 베를린 시민들에겐 일종의 자부심을 안겨주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도시 전체가 마치 대 공사 중인 것 같이 어수선하고, 과거 독일인의 미덕이라 알려졌던 온데간데 없이 공공 교통수단이 자주 마비 되어도 베를린 사람들은 엄청난 인내와 관용을 베푼다. 지저분하고 불편한 도시 환경을 트집 잡는 이들에겐 오히려 <이게 베르린이야, 이게 바로 쿨한거야, 그게 싫으면 ( 잘 살고 깨끗한) 남독으로 가버려 !> 라고 불평불만자들이라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베를린은 프리즘에 반사하는 그런 영롱함이 아니라 마치 옛날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에 신기하기만 하던 만화경 속의 모습 같다.대도시의 현기증 나는 속도전과는 반대로 아직도 구식 벽시계의 늘어진 추같은 느릿함과 골동품 냄새가 풋풋이 나는 그런 시골스러움이 병행하는 도시다. 도시 곳곳은 물론 중심가를 달려도 계속 보이는것은 건물들보다 공원과 녹지대가 더 많아서 이게 뭐 대도시인가, 과연 독일의 수도인가 하는 착각을 하게 한다. 물론 보베라이터 시장이 10년 전에 말했던 것 처럼 2013년의 베를린은 그토록 가난하지 않지만 여전히 쎅씨한 것은 틀림없는듯 하다. ( 현재 전체 실업률이 평균 6 퍼쎈트 정도인데 비해 베를린은 아직도 11퍼쎈트를 윗도는 독일에서 가장 높은 곳이지만.)
상대적으로 주택비와 생활비가 월등 저렴하기 때문에 베를린으로 최근연간에 세계 도처에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몰려오고 있다. 그들은 과거 장벽이 있던 빈 터들과 허물어진 옛 건물들을 점령하여 전위적이고 창의적인 예술 활동을하고 있다. 수요보다는 공급이 월등 높아서 예술 과잉 생산지가 바로 베를린이라고 한다.
분단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은 이제 엄연히 관광 상품이 되어서 베를린 수입고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고 밤과 낮이 뒤바뀐 수많은 클럽과 술집. 음식점들과, 파티와 온갖 문화 행사로 폭발하는 베를린은 전 유럽의 젊은이들이 주말을 논스톱으로 즐기러 오는 거대한 유흥장처럼 되었다. 최근 유로위기 때문에 그리스, 스페인등지에서 오는 이민자들과 아프리카와 아랍 쪽에서 오는 난민들과 정치망명자들은 지금까지 주로 터키인들이 외국인 점유율의 주종을 이루던 베를린을 본격적으로 다양화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이 형형색색으로 짊어지고 오는 역사와 문화가 첨가되는 베를린은 이제 명실상부한 독일의 수도로서, 유럽을 이끄는 심장부로서 움트고 있다. 베를린은 독일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이자 가장 독일적이지 않은 독일의 도시이다.동시에 베를린은 수많은 방랑자들, 이방인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의 도시이기도 하다. 베를린의 매력에 매료된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베를린 사람이라고 자처해도 좋다는 의미에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고 한 케네디의 그 말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나는 지난해 약 40년간의 독일 생활을 큰 여행 하나에 구겨 넣고서 서울에 들어가서 약 반년간을 살아 보았다. 고달펐던 예행연습은 본 무대에 오르지도 못하고 끝나버렸지만 서울 체험기는 긴 해외생활을 반추하는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서울은 화려했으나 이방인에겐 차거웠고 요란했으나 공허했었다. 나이, 성별, 가족사항, 출신 지역, 동창, 학력, 인맥, 직장, 등등 그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으면 이방인들이 비집고 들어 가기 어려운 폐쇠된 공간이였다. 특히나 „ 부자 되세요 „ 라는 징그러운 인사말을 주고받는 즉 물신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를 겁없이 과시하는 서울에야 말로 없는자들,소수자와 약자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베를린 장벽이 존재하는듯 했다.
그래서 비록 가난하지만 매혹이 넘치는 한사람의 베를리너가 되고자 다시 고향을 등지고 이곳 베를린으로 왔다. 하긴, 종로에서 뺨을 맞고 어디서 어쩐다는 말처럼 서울에 입성하려다 실패한 어느 해외 동포가 분풀이로 이 어줍짢은 베를린 찬가를 끄적거리는 거나 아닌지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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