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들이나 오랫만에 고향을 찾는 해외동포들이 한국에서 발견하는 생소한 풍경들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유럽과는 판이하게 달리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광고 문화와 도시 하늘을 수 놓는 무수한 십자가들이다.
더 크고 더 자극적인 묘사들로 서로가 경쟁을 하듯 울긋불긋하고 울퉁불퉁한 간판들은 마치 고객들을 불르는 아우성 같으다. 예를들어 토종 닭갈비에 오겹살 보쌈, 주물럭 해물탕에 철판 모듬 구이, 묵은 김치찌게에 황토 오리고기 등등..…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먹꺼리 간판들이 그야말로 푸짐한 상차림이 되어 온 도시를 먹자판으로 뒤덮고 있다, 정작 먹어보면 달콤한 선전들과는 다른 내용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야 간판들이 책임질 일이 아니다. 아직 간판에 대한 심미안이 부족해서이던가 아니면 일정한 규격이나 미적 기준을 규정하는 법이 불충분해서 일것이다. 그러니 어쩌랴...그저 애교로 받아들일수 밖에 없다. 그 진풍경이야 말로 이방인들을 사로잡는 서울의 특히 서울 야경의 매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들의 난무는 그에 비하면 조금은 엽기적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마치 홍등가처럼 붉은 네온싸인으로 즐비하게 밤하늘을 누비는 것은 가히 기괴한 풍경이라 하겠다. 기독교가 국교인 유럽인들이 그 광경을 보는 것은 일면 충격이기도 하고 한편은 코메디 장면을 보는듯도 할 것이다. 만약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다면 행여나 동방의 작은 나라로 재림하는 예수의 밤길을 밝히려는 활주로의 신호등인양 환히 줄지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예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아마도 식당들이 간판 공세로 손님들을 끄는 것과 같은 경쟁논리가 작용하여 어쩌면 소박하다 못해 유치함으로 전락해버린 한국 기독교인들 특유의 문화라고 해 두자.
그러나 잠시잠깐의 관광이 아니라 지난해 몇 달을 서울에서 살다보니 또하나의 새로운 진풍경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도처에 걸려있는 CCTV이다. 공공 건물은 물론 아파트, 슈퍼. 식당,.. 별별 곳곳에 씨씨티비 작동이라는 경고문을 발견하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좁은 골목길 담벼락에도 „ 여기 무단으로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요“ 라는 팻말과 더불어 <CCTV 작동 중>이라는 빨강색 딱지가 붙어 있다. 범죄자 색출 뿐 아니라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시민들을 교육하는 방법으로 까지 애용되고 있다. 아이러니컬 한 것은 그 경고판에도 아랑곳 없이 온갖 쓰레기 봉지들이 골목길에 딩굴고 있다는 것이다. 길에다 마구잡이로 쓰레기 봉지를 던지면서도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는 묘법을 알고 있는 영특한 시민들이 있다는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외박이 눈알처럼 불거진 둥근 카메라가 불끈 내려다 볼때 마다 마치 범법자가 된듯한 근거없는 불안감이 순간순간 스쳐갔다. 그 감시의 수많은 눈들은 요란한 간판 들과 십자가들의 넌쎈스를 애교나 엽기라고 하던 나의 여유로움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이건 아니야 „하는 섬뜩함을 들게 하였다. 왜냐하면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그 눈알 속에 찍혀서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어느 은밀한 공간에서 샅샅히 나의 모든걸 검증할 것 같은, 즉 우리들의 속옷인 생각과 사상까지도 검증할 수 있을, 그 페쇠회로 티비는 국민 의식 문제이자 국가 권력의 횡포로 직결되는 정치문제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감시에 자신이 노출되는데도 왜 하등의 항의를 하지 않는지,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시자를 볼수 없는 일방적인 정보 행로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너무도 안이한 생각이다. 우리들의 행동거지를 찍고 분석하는 감시자는 가깝게는 동네 작은 슈퍼의 주인일 수도 있으나 멀리서는 막강한 권력이나 국가일 수도 있다. 이에 아무런 제동을 걸지않는다면 민주시민으로서 기본인 권리행사의 태만 내지 포기를 의미한다,
정보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정보의 이용이라는 이면에 정보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을 여하히 보장할 수 있는가라는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한다. 정보의 불평등한 흐름은 즉 일방적인 통행은 인권을 침해할뿐더러 나아가서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쓴채 실제는 철저한 통제의 사회를 만드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9. 11을 통해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선 모든게 허용되는 면죄부를 받은 셈인데, 미국의 이익에 저해되면 그 누구라도 언제든지 예비 테러리스트가 되고만다. 미국은 그를 빌미로 이제 이 세상 모든 정보를 소유할 특권을 가질 뿐더러 세계 각국 정치가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망라할 수 있는 정보망을 구축하여 정보체계의 종주국 행세를 하고 있다. 최근 독일에서는 메를켈 수상의 휴대폰이 미국 정보당국에 의해서 고스란히 도청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양국간의 외교가 냉각됨은 물론 큰 정치이슈화 되어 상당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 한국이야 스스로의 국민들을 공공연히 도청하는데 솔선수범하고 있으니 미국의 그러한 행보에 어련히 관용을 베풀겠지만.
독일의 경우 사적 정보 공개와 정보의 유통 문제는 상당히 민감하고 거부반응이 심한 테마이다. 국가간에 약간의 차이는 나지만 이곳 유럽에도 공공 건물등 필요한 곳에는 당연히 씨씨티비가 설치되어 있다. 며칠 전 파리에서 신문사에 총격을 가한 범인이 씨씨 티비에 선명하게 포착된 사진이 즉각 온세계 언론에 공개된 것은 그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씨씨티비 만능주의에 빠져있지는 않다. 정확한 통계치는 모르지만 나의 직감으로는 한국의 씨씨티비 설치는 당연코 세계 제 1위일 것이다.
타인으로 부터 늘 불이익을 당할수 있다는 피해 망상증이 한국 사회에는 만연되어 있다. 참혹한 동족간의 전쟁을 치룬 트라우마에서 치유되지 못한채 오랜 세월을 독재와 정치의 부재 내지 후진성속에 살아온 결과, 불신과 불안은 한국인 의식속에 도사리고 있는 가장 큰 내부의 적이다. 그런 맥락에서는 타자를 항시 감시해야 하고 그들로 부터 보호 장치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한편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감시체제가 일상화되면 자율성과 역동성은 축소되고 끝내는 판단력과 도덕성 마져 흐려진다. 민주개체로서의 주체성이 상실되면 강자나 권력 나아서는 국가 폭력에 길들여 지게되고 만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그 구성 성원들의 부단한 문제 제기와 저항의 밑거름이 없이는 절대로 자라지 않는 나무가 아닌가 ?. 자유 역시 감시와 견제에 부단히 제동을 거는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자유와 법치를 모독하는 연쇄 사건들이 쏟아지고 있다 . 민주주의라는 피를 마셔야 살아나는 유신독재의 Zombie좀비들이 하나 둘씩 비틀거리며 일어 나고 있다. 그들이 밤마다 민주주의라는 청순하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징그럽고 날카로운 잇발을 박아넣고 있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담아내는 씨씨티비를 이제 국민들이 전국방방 곡곡에 장치해야 할 판이다. 입만 열면 거짖말을 하는 권력자들, 무능하고 수준없는 정치인들, 낯간지러운 줄 모르고 아부하는
기회주의자들, 사이비 언론들 …그 모두들에게 이제 우리가 그들의 감시자가 되어 카메라의 눈을 조준하지않으면 민주주의가 빈사상태에 빠질 위기이다.
경고 !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파괴범들을 색출하는 고성능 씨씨티비 작동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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