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stag, 30. November 2013

Novemberwetter


독일 사람들이 가장 고약한 날씨를 지칭할   <11 날씨같다고 한다.
오늘이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우울과 고독을 노래한 숱한 시들과 문학작품들을 구태여 탐독하지 않아도
끝이 보이지 않게 낙옆이 깊게 쌓인 길이며  희뿌연 안개를 뿌리며 살갗을 축축하게 적시는 겨울이 닥아서면  적어도 11월을 원망하는 한편 정도를 읊조려야 살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운이 좋으면 황홀한 가을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는  <황금의 10> 비해 11월은 결코 환영받는 달이 아니다. 하늘과 땅이 모두가 하나의 색갈인 쟂빛이 되어  을씨년스런 비까지  내리는 11월의 독일 날씨, 가을의 마지막 자락은 정말 음울하기 짝이 없다.

1938 나치들이 유태인 상점들을 박살내고 유태 교회당을 방화하던 밤도 바로 이렇게 음울하기 짝이 없는 11 이였다. 희생된 망령들의 원한과 통곡이 짙은 안개에 저며들어 몸을 죄는 듯한 전율과 절망이 울적한 날씨를 더욱 견디기 어렵게 한다.
올해는 <포그롬Pogrom> 75주년이 되어 전국적으로  당시의 만행을 기억하고 경고하는 많은 행사와 집회가  계속 진행중이다. 11 9일에는  베를린 시장과 유태인 중앙위원회장, 신구교 교구장 등을 선두로 침묵의 행진이 있었는데, 현수막에는< 기억하자, 추모하자, 함께가자 >라는 구호였다.

1938 11 9일은 <제국의 포그롬> 혹은 < Reichskristallnacht제국의 수정의 >이라고 불리우는데 나치 정권의 유태인 종식(말살) 정책의 분기점이 날이다.  이미 1933 부터 유태인 법이 만들어졌지만  실지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된것은 부터였다.   난데없이 닥친 나치 친위대는 유태인들의 상점들을 약탈하고 유태인 교회당에 방화를 자행하였다. 전국에 걸쳐 유태교 회당의 절반가량인 1400곳이 파손되었고 11 7일에서 13 사이에  적어도 400명의 유대인들을 학살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산산히 깨져 흩어진 상점 유리창 조각들을 수정에 비유해서  < 수정 크리스탈의 >이라고 지칭하였다 ! 결코 미화해서는 아니될   명칭의 저변에는 나치들의 철저히 계산된 정신심리가 고스란히 베여있다고 하겠다.
울부짖고 끌려가는 희생자들과는 아랑곳없이 상점 유리창 파편들이 가로등에 반짝이는 광경을  크리스탈의 빛남으로 연상한 것은  두가지로 유추 분석 볼수 있다. 하나는 크리스탈이라는 보석과 재물의 연상은 앞으로  자행할  유태인 재물의 탈취를  예고한 것이다. 둘째는 아리안 민족의 순수함을  맑은 수정에 비유한  인종 순혈 주의에서 연유했을 일수도 있겠다.

40 이상을 사는 독일이지만  유태인 학살이라는 인류 초유의 만행과  연관지을 때마다.독일내지 독일 인들에 대한 생소함과 괴리감은 떨구치기가 어렵다.
베를린의 남쪽 아름다운 호수 반제  (Wannsee) 위치하는  별장에서 1942 유태인 최종말살안이 결정되었기에 그곳을 지날 마다 현재의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풍경이 마치 허깨비를 보는양 소화하기 힘든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이런 끔찍한 독일의 과거사는 풍요롭고 평화스러운 전후세대에겐 선조들로 물려받은 악몽이고   현재의 독일을 사는 외국인들에겐  믿어지지 않는 수수꺼끼 같으다.  일상에서는 망각하고 살다가도 독일의 과거 청산을 위한 노력을 도처에서 만날 마다  새삼 불편한 진실과 다시금 맞딱드리게 된다. 과거청산은 강력하고 민주적인 사회와 유럽을 이끄는 모터로서 오늘날의 독일을 존재케하는 근거라고  하겠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선두로 나치와 그에 부역한 사람들의 처벌, 동방정책으로 과거 점령국에 대한 사과와 보상, 유태인 학살에 대한 배상과 이스라엘에 대한 우호, 라는 정치적인 틀뿐아니라 거의 생활화 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희생된 유태인들의 옛집 앞에 그들의 이름을 적은 팻말을 걸거나  희생자들의 이름과 사망일을 각인한 황금색의 작은 돌을 보도에 박아 넣은 이른바 <발부리에 채이는 걸림돌Stolperstein> 만들어서 그냥 지나치지 않게 하는 식으로 일상화 하고 있다.  학교에서  역사 교과서는 물론 다양한 시청각 교육과 일반 언론및 방송에서 끊임없이 방영하는 기록물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인터뷰등은  독일인들에겐  지울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있음을 알게한다.

물론 신나치들의 출현과 극우당의 존재는 독일의 과거청산 문제는 아무리 강화해도 부족하다는 것과  지속적으로 해야함을 상기시키고 있지만  역사를  깡그리 왜곡하고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일본의 태도에 비하면 당연히 우등생이고 본받아 마땅하다. 독일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일본인들의 과거 청산문제나 역사인식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식밖의   이지만 우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을 비판하기 앞서서 스스로의 역사 정립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것을 부끄러워 해야하지 않을까?   간단히 말해서 친일의 잔재는  전쟁과 독재를 이어서 지금까지 한국 지배층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사 정리는 민주정부 시대에 와서야 겨우 시작단계에 들어 섰지만  불행이도 기간에 그나마 이루어진 성과는  현실정치의  와중에 가려져서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세간의 빛을 보지 못하였다.  왜곡된  역사 바로 잡거나 국민의식 교육에 결정적인 역활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과가 바로 지금의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가능하게 것이다.  박정희의 딸이라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대통형이 있었던 그녀가 이끄는 정부를 탄생시킨 지난해 선거는 한국인의 역사 의식 내지 과거청산이라는 숙제를 푸는데 미숙함, 아니 무능력함을 총체적으로 들어낸 것이다.
예를 들자면, 네델란드 왕비가 과거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에 복무하던 장관의 딸이라는 소위 출신성분 때문에 결혼 전에  네델란드 의회에서 동의를 얻지 못하게 되자 공식 결혼식에 신부의 아버지를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상기해 보자. 작은 일화를 비교의 저울에 올린다면  박근혜가 비록 출중한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은 결코  그녀가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서도, 될수도  없다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탈선해서는 아니되는 공공의 도덕이 지켜지는 민주주의 국가와  국민들의 건강한 역사의식이 작동한다면 그런 사태는 처음부터 있을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 그래서 우리는 불행한 결정의 부작용을 도처에서 직면하고 있지 않는가.

독일은 전쟁과 더불어 분단이라는 상처를 딛고 1989 11 9, 바로 1938 11  포그롬이 있었던  51 ,   같은 밤에 동서 냉전의 상징이던 장벽이 붕괴되었다. 통일로 넘어가는 가는 대로가  환히 뜷린 것이다. 1989 11 9, 동독 공산당 서기 귄터 샤보브스키 (Günther Schabowski) 동베를린에서 세계 기자들 앞에서 동독시민들이 서독을 비롯하여 외국으로 자유롭게 여행 있다는 새로운 법규정을 발표하였다. 발표후 이어서 봇물처럼 터진 환호성과 흥분은 동베르린에서 서베를린의 거리를  향해 휩쓸었다.  수많은 동독인들의 물결은 당시 세베를린의 중심 상가인 쿠담으로 흘렀고 사람들은 아무나 서로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들을 흘렸다. 그날의 티비에 비치던 독일인들의 감격에 모습들은 잊을 수가 없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독일인들의 격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를 울린다. 독일 역사의 중요한 사건이 우연하게도 같은 날에 일어 났다는 것은 독일인에겐 행운이고  분단의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들에겐  부러움과 자책을 안긴다
인류에서 가장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독일이 영원히 분단의 고통을 누려도 죄값을 하지 못할텐데 우리민족이 제일이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는  노래를  60년을 넘게 불르는 우리를 제치고 번듯이 그것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통일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감격을 함께 즐기기전에  본능적으로 이건 정말 너무 공평하지 않다 라는 투정이 앞섰다그러나  목이 쉬라고  부르는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는 노래는 이미 내용을 상실 내지 망각해 버린  말과 체면의 남발만이 되어버린 거는 아닌지. 과연 우리는 조용히 내적으로 실제 민족 사랑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실천을 것일까세계에서 마지막 분단국이란 치명적인 위상을 여전히 철통처럼  지키고 있는 그야말로 못난 우리 민족에 대한 자괴감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자 통일 독일로 진행되는  감격의 날들이 연이어졌다. 과거 분단시   베를린의 시장이였던 빌리 브란트 수상의  주름진 얼굴이 감동에 차서 티비 화면에 비쳐올 때는 더욱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장벽의 허물어진 앞에서 그는 바르샤워에서  나치 독일의 과거를 청산하러 무릎을 꿇던  브란트 수상이 아니라  한사람의 독일인이 되어서 사랑하는 조국의 통일 목전에 두고 벅차 하던 모습이였다. „원래 하나였던 것은 결국 함께 자라게 된다.“.. 라는 그의 문장들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지난해 나는 오랫만에 고향의 가을을 만끽했다. 청명한 하늘에  날라갈듯 상쾌한 날씨를 자랑하던 11, 고향 땅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은 충동에 이거리 저거리를 누비고 다녀 보았다. 그러나   해말간 하늘 아래  독일의 11 날씨보다 음울하고 잔인한 우리의 분단역사가  여전히, 도처에서,  진행형임을 모르는 해버릴 없어서 끝내 행복하지 못했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들은 전혀 치유되지 않은채 트라우마가 되어 있고  희생된 수많은 망령들은  분단의 철조망에 걸린채  아직도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훨훨 나르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굿이라도 한판 해야하지 않을까.

이번 주초에는 이란과의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뉴스가  시간마다 뉴스로 뜨고 있다.
한번  뒷통수를 치는것 같다. 북핵문제는 결국 미국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들어 나면서 남북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새삼 절박하게 한다.  전쟁과 독재에 희생된  수많은 원혼들을 달래 분단의 장벽은 전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반도를 둘러싼  어두운 그림자가  도무지 우울을  가시지 않게한다.

1130일오후4, 벌써 부터 어둠이 깔리고  비는 하루종일 뿌리고 있다.  1989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함성속에  잠시 사라졌던 1938 11 포그롬의 원한들이  다시 살아나는 듯한 착각속에 오한과 공포가 서려드는  날씨다

2013 11 30, 베를린  
Pieter Bruegel der Ältere, 1565 »Heimkehr der Her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