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Berlin에서 살고자 하면 먼저 무슨 동네를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게한다.
도시가 크니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다는 것도 있지만 동네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성격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 사는가 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과 거의 동일시 되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는 나는 무슨 지역에 삽니다 하는 것은 나는 대충 이런 부류의 사람이요 라는 대답이 되는 셈이다. 물론 지역별로 빈부의 정도에는 차이는 있지만 서울처럼 강남 강북이라는 커다란 계층상의 양분구도와는 다른 의미에서다.
우선 과거 동베를린에 속했던 지역인가 아니면 서베를린 지역일것가를 정하는 것이 일차적인 고민꺼리다. 통일된지 25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외형상으로 지난 시절 동서 베를린의 차이를 느낄 수는 없다 . 그러나 구 동베를린 지역을 가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동독의 흔적들을 아직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아니 자연히 분단의 시간으로 더듬어 가고 싶어지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표정, 그들의 옷차림, 그들의 행동 반경, 그 동네의 내음과 색갈은 살면서만 체함할 수 있는 일이다.
과거 동베를린의 동네 중에서 제일 먼저 베를린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된 곳은 프렌츠라우어베르크Prenzlauer
Berg 이다. 그곳은 동베를린 시절부터 자유로운 영혼들이 거닐던 동네였다. 미술가들,
작가들, 음악가들 뿐아니라 정부 비판자들이 즐겨 살던 곳이였다. 특히 19세기 때 부터 지은 건물들이 전쟁을 피해 일부가 고스란히 남아서 동독정부가 건축 보호책을 강구했을 만큼 베를린 안에서 고풍스런 건물이 나름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약간의 언덕바지가 있기도 해서 파리의 어느 골목들을 연상하게도 한다. 서쪽에서, 즉 과거 서독에서 통일 수도인 베를린으로 이동해 온 사람들 중에 특히 학생들, 예술가들이 집중적으로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대안의 사회를 구가하는 자유의 보헤미안들이 거니는 곳이 되었다. 지금은 각종 친 자연 상점과 유기농 식품점이 베를린 안에서 가장 많이 운집해 있어서 소위 비싼 유기농 쥬스를 마시면서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보헤미안 브르죠아 혹은 보헤미안 좌파들의 보금자리라는 딱지가 붙은 동네로 알려져 있다,
이와 비슷한 인기 지역으로는 베를린 장벽이 버티고 서 있던 미테Mitte가 베를린의 새로운 심장으로 그 위상을 갖추느라 분주하다. 정부 청사와 각국 대사관들, 고급 상가, 중앙 역 그리고 쏘니쎈터를 중심으로 미디어 씨티, 브란덴 부르크 문, 박물관과 미술관, 훔볼트 대학, 오페라, 콘써트 홀 등으로 베를린의 명실상부한 정치, 문화의 중심부 역활을 하고 있다. 다만 아직도 미완성인 상태라서 전체 지역이 하나의 거대한 공사장을 방불케하지만...
과거 서 베를린에 속했지만 장벽으로 인해 허름한 변두리였던 곳이 중앙 지역으로 다시 태어나는 동네는 크로이쯔베르크Kreuzberg와 최근년간에 폭발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노이퀠른Neukoelln이다.
전통적으로 시민계급층이 살던 고상하고 부티가 나는 과거 서베를린의 안락한 지역인 샬로텐부르크Charlottenburg나 빌머르스도르프Wilmersdorf
그리고 쩰렌도르프Zehlendorf도 있지만 통일된 이후 이동하여 온 인구들과 외국인들, 특히 젊은 층들은 주로 새로운 중심지인 미테, 프리드리히스하인Friedrichshain,
프렌츠라우어베르크 와 크로이츠베르크,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노이퀠른을 압도적으로 선호한다.
크로이츠베르크는 베를린 장벽과 접한 지역이였기에 통일 전에는 주로 터어키 노동자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곳으로 독일의 이스탄불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동네다. 지금도 터키인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이젠 동네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서 베를린 특유의 다양한 인종과 다문화가 멋있게 성공한 공동체로서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다. 특히 관광객들에게는 허름한 골목길에 빼꼭이 들어서 있는 카페며 식당들, 술집과 클럽들이 엄청난 인기가 있어서 전유럽, 특히 뉴요커들까지 몰려오고 있다. 세계에서 소위 가장 쿨cool한 동네로서 꼽히기 까지 한단다. 예술가들의 낙원이라 할 만큼 즐비한 갤러리며 빈터나 과거 공장 건물에 들어선 예술가들의 작업장과 전시장은 동네 전체가 현대 미술 전람회장, 혹은 행위 예술 공연장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넘쳐나는 크로이쯔 베르크 매력의 물결은 최근년간 들어서 인접한 동네인 노이퀠른으로 흘러 들어 요사이는 베를린에서 가장 생동적이고 요란번쩍한 동네로 부상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난한 외국인들, 저소득층 독일인들이 주로 살던 곳으로 베를린 안에서 가장 골치아픈 문제지역이라는 오명을 누리던 노이퀠른은 이제 크로이츠베르크과 더불어 베를린의 다문화적 요소가 가장 극명하면서도 그 속에 조화와 멋을 내는 동네로서 예술가들, 젊은 층과 외국인들에게 열광적인 사랑을 받는 동네가 되었다.
무엇보다 베를린 사람들의 자기 동네 사랑은 알아 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독일인들의 고향에 대한 애착은 거의 본능적이라 할 만하다. 독일 사람들은 외국에서나 다른 지역에서 오래 살다가도 노년이 되면 대부분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 오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어 한다. 그 때문인지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한 애정 또한 유별난 경우가 허다하다.
베를린의 경우는 대도시이기 때문에 대부분 자기가 사는 동네가 자기 세계라고 할 만큼 사는이의 일상과 의식이 사는 곳과 긴밀히 직결되어 있다 .특히 베를린에는 한 동네 안에서도 어느 특정한 거리나 골목을 중심으로 매일매일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인프라, 즉 빵 집, 카페, 술집, 식품 가게, 극장이나 기타 문화 시설등을 나름 골고루 갖춘 일종의 섬 같은, 소위 키츠Kiez라는 꼬마 동네를 형성하는 키츠문화가 유명하다. 사는 사람들 끼리 그 속에 소속감과 동질감을 공유하면서 자신들 특유의 키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키츠의 생활 양식과 문화를 서로 가꾸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지역마다 이런 키츠들이 여러군데 있는데 특히 중심지의 인기있는 키츠에 사는 것은 사뭇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베를린이 이렇게 지역 마다 색갈과 성격이 다르니, 나에게도 방문객으로서가 아니라 이제 새로운 둥지를 트려는 동네 선택은 엄청 고민꺼리였다. 그동안 내가 아는 베를린, 즉 간헐적으로 잠시 머물면서 친숙해졌던 곳들은 주거 환경이 쾌적한 서쪽 동네들이였는데 그 사이 월세가 치올라서 한 때 집세가 독일 전역에서 거의 밑바닥을 돌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었다. 그간 안팍으로 수리를 한 고 가옥들은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을만큼 위용이 당당하고 고급스러워져 버렸다. 10여년 전 만해도 비어 있는 집들이 즐비하고 아침 신문을 보고 찾아가면 그 자리에서도 계약이 가능하던 크로이츠베르크도 이미 베를린의 중 상층이나 지불할 수 있는 가격이 되었고 세를 주는 빈 집이 거의 나지도 않는다. 과거 동베를린 동네들은 방문 갈 기회가 적어서 거의 아는 곳도 없었지만 인기 지역의 집 값은 다른 대도시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뉴욕, 런던, 파리 등의 주택비에 비하면 아직도 베를린은 시골 값이라 하겠지만 과거의 베를린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있다.
그랬다. 내가 알고 기억하는 막연한 기대속의 베를린은 이미 다른 얼굴을 들어 내고 있었다. 이렇게. 막차를 타고 온 나의 베를린 행, 나의 집 구하기는 결국 베딩Wedding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베딩 Wedding은 베를린 시내 북쪽에 위치하는데 현재 동네 평균 연령층이 약 40대로서 가장 젊은 편이고 외국인 점유률이 약 40 퍼쎈트인데 출신배경으로 보면 거의 70 퍼쎈트를 육박할만큼 외국인 거주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과거 한 때는 붉은 베딩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정도로 공산당과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곳, 전통적으로 베를린 노동자들의 지역이였다.
분단 당시는 서베를린에 속하긴 했었지만 장벽과 인접한 동네라서 자연 집세도 낮고 외벽 수리와 실내 개조나 수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건물들이 마치 전쟁이 방금 끝난듯 어수선하게 널려져 있던 곳이다. 그러다 보니 주로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들 특히 터키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지금도 베딩 외국인들 중 반 정도가 터키인들이다.
그들은 골목마다 헌 가구들과 잡동사니 물건들을 염가로 파는 고물상을 차려놓고 길에 걸상을 내놓고 한가하게 앉아 있다. 그들이 주 고객인 카지노와 터키 음식점 야채상점들,
그리고 터키 다방들, 이발소들이 즐비하다.
동네의 중심을 관통하는 두개의 대로에는 고급 백화점 하나 없이 그저 일상에 필요한 갖가지 상점들이 편리는 하지만 아무런 매력없이 길게 늘어져 있다. 길들은 잘 청소되지 않은 대도시의 전형적인 지저분한 뒷골목 답게 쓰레기들이 딩굴고 북서쪽에 있는 테겔Tegel 공항의 이착륙로가 멀지 않은 덕분에 머리위로는 비행기의 굉음이 심심치 않게 울려 퍼지는 곳이다. 관광 명소라고는 하나도 없는 동네다.
말하자면 베를린의 빈촌이라 하겠다.
이런 베딩이 최근들어 비교적 베를린의 중심부에 위치한 교통의 편리함과 더불어 과거 고립되고 정체되었던 베를린의 스잔한 모습이 남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서서히 주목을 받고 있다. 즉 오랜 잠에서 아직도 깨나지 않은 채, 말하자면 현재의 시간대로 화장을 고치지 않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예술가들과 젊은이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점차 크로이츠베르크나 노이퀠른 혹은 프렌츠라우어베르크에서 비싸지는 주택비와 작업장의 감소등으로 주변화되어 밀려 나오면서 최근 베딩에 새로운 예술 문화 아이템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베딩이 이제 베를린의 매혹 동네인 제 2의 크로츠베르크가 될 다음번 타자인가 하는 논란이 심심치 않게 돌고 있다. 새로운 카페와 술집이 힘겹게 하나 둘씩 자리잡기 시작하고 집들도 느릿느릿 내부 수리와 외부 단장을 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미 예술가들은 과거 대중 교통차량을 정비하고 수리하던 대형의 대지와 건물을 인수하여 음악 미술 연극등 다양한 예술가들을 위한 우퍼할레Uferhalle라는 종합예술공동체를 만들었다.
작년에는 이미 오래 전에 정지되었지만 과거 화장터였던 건물에 현대 미술 중심의 새로운 갤러리 등이 들어서기도 하여 화장터 주변으로 예술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단다. 이렇게 예술가들의 이동하고 활약한다는 것은 곧 한동네가 긴 잠에서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크래마토리움Krematorium의 갤러리스트는 „관광객도 요란스런 각양각색의 첨단문화도 없는 이 가난하고 조용한 베딩이야말로 진짜 원래의 베를린 모습이다“ 라고 시내 한 복판에서 잘 나가던 갤러리를 접고 베딩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나는 약 반년간 베딩의 거리들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집 찾기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하루, 우연하게 어느 아늑한 골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작은 길 이름은 말쁘라케슈트라쎄Malplaquetstrasse였다. 말쁘라케는 프랑스 지역명인데 1700년대 스페인 대전 때의 전투지명으로 알려진 곳이다. 거리명에 얽혀진 이미지와는 전혀 대조적으로 곡몰 길은 차가 빨리 다니지 못하도록 띄어띄엄 좌우로 화단을 만들어 놓았고 멀지않은 곳에 있는 대로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갑자스런 정적이 감돌았다.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딩구는 오래된 돌 길에는 늦 가을의 정취가 축축히 젖어 있었다. 어린이 놀이터에는 아이들 노는 소리가 밝게 들리고 나무의자에 앉아서 담소하는 젊은 엄마들의 모습이 평화스럽게 보였다. 들어서는 길 모퉁이에는 이쁜 카페가 하나 , 조금 걸으니 헌 책방, 좌파당의 동네 상담사무소, 거기서 몇 집 지나서는 녹색당의 동네 상담 사무소, 좀 더 걸으니 어린이 놀이방과 골동품 집, 금방 또 어린이 놀이방이 하나 더...
길이 끝나는 모퉁이에는 카페와 음식점, 건너편에는 나자렛 교회가 있고 몇 걸음 더 걸으니 바로 베딩의 중심 광장인 레오폴드 광장이 있었다. 위치로 보아서는 아주 한 복판인데도 어쩐지 목가적인 분위기가 한가닥 서려 있었다. 그 순간 여기 이 골목이라면 살아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약 반 년 후 그 길에서 행운을 얻은 것이다 . 이런 걸 사람들은 인연이라고 할 것이지만 어쩌면 일종의 객기였는지도 모른다.
교통이 편리하고 시설이 어느정도 반반하면서도 월세가 그리 높지 않는 집이 광고에 뜨면 일찌감치 달려 가 보아도 이미 학생들과 젊은 층이 집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 고정 수입이 있는 안전한 쪽을 주려는 주인들의 계산 때문에 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우리는 대체로 환영받는 기색이였지만 간혹은 외국인에게 대한 편견이나 그 어떤 이유에서던가 여러 차례 툇자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Malplaquet str.에 반한 우리들의 욕심 때문에 가능하면 그 길, 적어도 그 근처에서 행운이 올것을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시점에 와서 어쩔수 없이 차선의 집 하나를 계약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직후에 갑자기 <우리의 >길에서 집을 주겠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이미 싸인도 했고 계약금도 낸 상태라서 거금 1000유로 이상의 해약금을 지불해야 했던 억울함도 불사하면서 아무튼 수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길로의 이사를 결정하였다.
베를린 곳곳에는 그나마 전쟁의 폭격을 면한 화려하고 웅장한 집들이 일부 남아 있거나 잘 복구되어 과거 베를린의 영광을 반추하고 있지만 베딩의 구가옥은 실상 거의가 대부분 당시 서민과 노동자 층을 위한 그저 소박하고 아담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살 집은 1900년 초반에 지은 집으로 그 길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리모델링을 안팍으로 하지 않은 까닭에 집 값은 현저하게 저렴했다. 대신 그 골목길에서 발코니도 없고 우중충한 회색빛의 외벽이 노쇠함을 말하는 단연코 가장 낡은 집이다.
이렇게 베딩을 나의 동네로 선택하게 된 것은 물론 집값이 낮다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였지만 아련한 기억들을 더듬고 싶어서 였다. 베딩에 대한 나의 실체없는 그림들은 이러저런 책속에 나오는 과거 베를린 노동자 지역에 대한 그리움에서 연유하였다. 지난 세기 초 , 인류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초유의 실험을 하던 그 시절, 거실을 대신하던 부엌 방의 흐릿한 전등아래서 세기의 변혁을 앞둔 희망과 기대, 긴장과 흥분속에서 혁명을 논하며 밤을 지세우던 아름답고 가슴 저리던 이야기들... 인류사에 최초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 그들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스스로 만든다는 자부심과 무한한 열정....그러한 당시의 빨간색 동네의 분위가 아직도 혹 살아 있을까 하여 나는 집 구경을 할 때마다 입구에서부터 지나간 시간들의 내음들을 맡아보곤 했다. 과거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은 당연히 찾을 길이 없지만 그들의 발걸음이 지나던 낡고 납작하게 내려앉은 문지방들,
손길이 닿고 닿아서 닳아 빠진 대문들이며 문고리와 손잡이들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집 입구를 장식하는 문양들과 높으면 3 메타를 훌쩍 넘게 시원하게 뚫린 천장들, 승강기 없이 4층이나 5층 까지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면서 만나게 되는 오래된 층계들과 난간들 , 층층마다 가끔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옛 창틀과 창문의 유리 모자잌. 대개 ㄱ 자나 ㄷ 자로 만든 건물 안에 있는 입주자들이 공동으로 쓰는 작은 안 마당, 그 모든게 오래 전 부터 친근히 알고 지내던 것들 같았다. 모든 낡은 집들은 그 자체가 시간이 남긴 유산이기에 어느 양식이건 어떤 상태이건 막론하고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부터 나는 마치 지난 시간 속으로 산책하는 듯한 행복한 착각에 빠져들곤 하였다.
생의 끄트머리를 여하히 보낼 것인가는 베를린에서 어느 동네에 살 것인가 라는 선택 만큼이나, 아니 좀 더 괴로운 결정이였다.
나의 오랜 친구들이 선택하는 길은 결국 각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과 무관하지 않는 결정들을 하였다. 하나는 이곳 독일에서의 40년간 생활을 미련없이 정리하고 산 생활 공동체를 하려고 지리산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랫동안 파리에 살던 그림 그리는 다른 한 친구는 혼자서 프랑스의 서북 끝에 위치한 외딴 해변가로 가서 자연 속에 동화하여 자신과의 화해를 찾았다. 다른 또 한 친구는 고단했던 직장 생활을 퇴직한 이후 대학에서 예술사며 인문학 강의를 찾아 다니며 학구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
지지난 해 예행연습으로만 끝나 버린 서울 행을 접고 이 베를린에서 가장 후지고 볼품없는 동네인 베딩으로 이사를 하고자 한다. 생의 막바지 지점까지 달려온 나는 잠시 그곳에 휴식할 수 있는 간단한 텐트를 치려고 장비들을 챙기고 있는 셈이다. 용감하고 현명한 내 친구들 처럼 자연과 화합하여 평화를 찾거나 모든 걸 내려놓는 비움을 터득하기는 커녕 아직도 속세로움에서 여전히 불안해하고 불만하고 있다. 그렇다고 못다한 학문이나 지식에 대한 뒤늦은 목마름을 채우려는 열정도 없다. 그저 늘 결정이라는 고통스런 경계선에서 허덕이며, 사람들과의 인연과 만남에 연연하면서 살아온 지금까지의 생과 도무지 결별을 할 용기도 없고 또 딱히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숱한 사람들과의 어울림 속에서의 고독과 인간들과의 연결된 고리 속에서 늘 감내해야 하는 실망과 좌절 혹은 배신의 늪을 향한 병약한 유혹의 손짖을 떨구치지 못한다. 만남이라는 생의 가장 달콤한 희열속에 그냥 나른하게 안주하려는 것이다.
베딩으로 향하는 이삿짐을 싸면서 이제야 나의 베를린 정착이 시작되는 듯함을
여럼픗이 감지할 뿐이다.
모든것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욕심, 그 하나의 짐만을 소중히 보따리 싸본다.
그리고 뜻밖에도 한 구절을 흥얼 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되도다.
2014년 3월 11일